자동차 이야기
이지아, 2021년 01월 18일
기아(KIA) 로고
예전 기아자동차(KIA Motors) 로고
대한민국에서 열 명 안팎으로 탈 수 있는 작은 승합차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봉고차’입니다. 봉고차라는 명칭의 유래는 과거 기아가 생산했던 소형 승합차 모델인 봉고(Bongo)인데요. 그 인기가 어마어마하여 원래 고유명사였던 차 이름을 보통명사로 각인시킨 케이스입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1981년 신군부에 의한 자동차 통폐합 조치에 의해 기아가 더 이상 승용차를 생산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봉고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봉고가 출시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자동차 산업의 흐름과 봉고가 승합차의 대명사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완성차 업체를 현대차와 새한차로업계들 간의 과잉 생산으로 생산율이 계속해서 하락하자 신군부 정권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에서 긴급조치를 단행하였습니다. 이 조치는 1980년 8월 20일 중화학 분야 투자조정 조치 항목의 하위 분야로 자동차 부분 투자조정 조치라는 명칭으로 처음 시행되었습니다. 이 조치는 1981년 2월 28일 자동차공업 합리화 조치를 발표하며 현실화되었습니다. 명목적인 이유는 국가가 나서서 국내의 자동차산업에 대한 일종의 ‘구조조정’을 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현대자동차는 현재의 한국GM인 새한자동차를 통합하여 승용차만 전문생산을 하고, 기아는 5톤 미만의 소형 상용차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되, 5톤 이상의 버스와 트럭은 당시 제조사들의 자유 경쟁에 맡긴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정부의 계획이 실현될 수 없는 결정적인 계기가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당시 새한자동차 지분의 50%를 가지고 있던 미국 제너럴모터스(GM)가 반발하고 나선 것입니다. GM은 새한자동차에 대한 자신들의 지분은 곧 한국 내 자동차 사업권에 대한 지분이라고 주장하면서 통합 후에도 50%의 지분과 경영권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그리하여 현대차와 새한자동차가 합병하는 상황은 GM의 반대로 인해 무산되었습니다.
애초에 계획했던 투자조정 조치가 계획대로 되지 않자 국보위에서는 이에 대한 대안으로 1981년 2월 28일 자동차공업 합리화 조치를 발표했습니다. 이 조치의 핵심은 통합이 불가능해진 승용차 부분 대신 상용차 부분에서 기아자동차와 동아자동차를 통합함으로써 통폐합 조치의 명분을 유지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번엔 기아자동차의 반발이 거셌기 때문입니다. 자동차공업 통합조치가 발표된 후 기아자동차는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국보위의 명령이라고 해도 규모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던 동아와의 통합은 회사 차원에서 도저히 불가능한 수준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1976년 아시아자동차를 인수한 기아자동차는 계속해서 누적된 부채 문제가 있었고, 이로 인해 동아자동차 측에서도 기아자동차와의 합병을 꺼리는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이 조치는 사실상 무효화되고 1982년 7월 26일 다음과 같이 최종 조치가 내려졌습니다.
최종 조치로 인해 기아자동차는 적자를 면치 못했던 이륜차 사업을 대림산업에 넘길 수 있게 됐지만 수익성이 높은 승용차 생산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막 종합자동차회사로 발걸음을 내딛은 기아자동차에게 국보위의 자동차공업 합리화 조치는 이제 막 자라나는 새싹을 자르는 것과 같았습니다.
기아는 신군부에 의해 강제로 승용차 생산을 중단하게 되어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대신 1톤 이상 5톤 미만의 트럭과 12~32인승 중소형 버스의 전문생산 체제를 갖추며 해당 차량을 독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원래 이 시장은 현대자동차가 1977년부터 점유하고 있었는데 조치가 시행되며 현대차도 더 이상 미니버스와 소형 트럭이었던 포터를 생산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마쓰다(Mazda) 로고
1975년 방한한 오마르 봉고 전 가봉
아프리카에 사는 영양, 봉고
봉고의 승합차 모델 ‘봉고 코치’
기아 봉고 코치 지면광고봉고의 국내 출시 초기인 1980년 초, 봉고는 ‘1톤 디젤 트럭(E-2200)’이라는 단순한 이름으로 출시되었으나 몇 달 후 마쓰다와 마찬가지로 봉고라는 이름을 붙여 판매되었습니다. 하지만 트럭 모델인 E-2000은 당시 위기에 빠진 기아를 되살릴 수 있는 카드로 여겨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1981년부터 봉고차의 유래가 되는 승합 모델을 출시하며 분위기는 역전되었습니다. 기아는 기존 트럭 모델과 구분을 위해 승합 모델에 봉고 코치(Bongo Coach)라는 이름을 붙여 시장에 내놓았습니다. 봉고는 출시 초기 승합차를 사기에는 부담스럽고, 승용차를 사자니 아쉬운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더니 전국의 자영업자들과 농·축·수산업 종사자들, 그리고 소규모 제조업자 등에게 폭발적 인기를 끌기 시작했습니다. 출퇴근은 물론이고, 배달용 차량이 필요한 소비자들에게 저렴한 가격과 운용상의 편리함 덕분에 기대 이상의 높은 인기를 끌었습니다. 봉고 출시 초기에는 개인이 자동차등록을 할 수 없도록 규제되어 있었는데, 지인의 회사에서 구매하는 것처럼 위장하여 구매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1982년 6월부터는 자동차에 대한 개인 등록이 인정되며 더 많은 소비자들의 관심을 끌었고, 봉고는 점차 승합차 자체를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봉고 코치는 그야말로 빅 히트를 치며 위기에 빠진 기아를 기사회생시켰습니다.
기아 봉고 시리즈 지면광고
레저 용도의 봉고와 주문진 캠핑장 지면광고
기아 봉고나인
기아 봉고타운
기아 파워봉고
기아 와이드봉고기아는 1981년 출시된 12인승 ‘봉고 코치’에 이어 1985년 9인승 ‘봉고 나인’을 출시했습니다. 1985년에는 9인승인 봉고 나인에 1.4리터 가솔린 엔진을 탑재한 저가형 모델 ‘봉고 타운’을 내놨습니다. 원박스카 형태였던 초창기 모델은 1987년 캡 형태의 ‘파워봉고’로 페이스리프트되며 그 성능이 향상됐습니다. 1989년에는 80마력 JS 엔진을 추가하고 파워봉고의 후속작품인 2세대 ‘와이드봉고’를 출시했습니다. 와이드봉고가 생산되던 6년 동안 해를 거치며 초장축 사양을 추가하는 등 기아는 끊임없이 봉고의 성능을 향상시켰습니다. 와이드봉고는 다시 한 번 개선돼 83마력의 JS 엔진을 얹은 ‘봉고 JS’로 탈바꿈했습니다. 이 모델에는 잠김 방지 브레이크 시스템(ABS)이 동급 최초로 적용됐으며, 소형 트럭 최초로 자동 변속기가 장착됐지만, 성능에 문제가 생겨 출시 2년 만에 단종되고 말았습니다.
현대차에 인수되기 직전인 1997년 기아는 우리에게 친숙한 1.4톤과 2.5톤의 ‘봉고 프론티어’를 선보였습니다. 승용차를 탄 것과 같은 승차감을 무기로 대대적인 홍보를 한 봉고 프론티어는 5년 동안 4륜구동과 외형 변경, 저소음 모델 등을 출시하며 많은 인기를 끌었습니다. 하지만 기아가 현대차 계열사로 편입된 후, ‘뉴봉고’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여 출시했음에도 배기가스 규제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해 3세대 봉고 트럭은 단종되고 말았습니다. 2004년에는 ‘봉고3 코치’라는 이름으로 출시되며 재도약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내구성 문제로 인해 그리 큰 인기를 끌지는 못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현대 스타렉스(Starex)의 아성에 밀려 저조한 판매를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기아는 수요 변화와 강화되는 안전 및 환경규제에 대응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1년여 만에 봉고3 코치를 단종시켰고, 이로써 기아의 원박스카 명맥도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현재까지 생산되고 있는 기아 봉고3
2020년 새롭게 출시된 기아 봉고 EV반면, 봉고의 트럭 라인업은 기아가 현대자동차에 인수된 뒤에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으며 기아의 살림을 거들고 있습니다. 과거 일본과 한국에서 전성기를 구가했던 봉고는 오늘날 마쓰다와 기아 양사 내에서 엇갈린 운명을 맞이했습니다. 마쓰다는 봉고라는 브랜드에서 손을 떼는 반면, 기아는 봉고의 전기자동차 모델을 출시하는 등 라인업을 미래차 트렌드에 맞춰 지속적으로 확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봉고의 본거지인 일본에서는 더 이상 봉고 신화가 일어날 수 없지만, 기아 봉고는 전기자동차로 계승됨으로써 여전히 명맥을 이을 뿐 아니라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습니다.